13살에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야쿠자 두목이 되었던 한녹춘. 그는 어떻게 암흑가에서 시작해 재일동포 사회의 대부로 존경받게 되었을까요? 무궁화장을 받은 숨겨진 애국자의 놀라운 삶을 함께 살펴봅니다.
목차
- 한녹춘, 잊혀진 재일동포의 전설
- 13살 소년의 일본 생존기
- 암흑가에서 야쿠자 두목으로 성장하다
- 재일교포 사회를 위한 헌신과 영향력
-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 박정희 대통령과의 교류
- 1조 5천억 자산의 비밀과 신한은행 설립 비화
- 한녹춘이 남긴 유산과 오늘날의 의미
1. 한녹춘, 잊혀진 재일동포의 전설
"나를 일본에 보내준 둘째 형님이 자주 떠올라. 이제 죽을 때가 된 건가? 꼭 한 번이라도 둘째 형님과 부모님 산소에 가보고 싶어요." 96세의 나이로 2017년에 떠난 한녹춘 회장의 마지막 소회입니다. 77년간 일본 땅을 밟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항상 모국 한국을 향해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역 재일동포 사회에서 '한녹춘'이라는 이름은 전설 그 자체입니다. 오사카 주재 한국총영사의 말처럼 "간사이 지역 재일동포들은 한녹춘 회장 얼굴 한 번 보는 걸 큰 자랑거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의 두목에서 재일동포 사회의 대부로 변모할 수 있었을까요?
2. 13살 소년의 일본 생존기
강원도 출신의 한녹춘은 1921년에 태어나 불과 14세(13세 주장도 있음)의 나이에 홀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타국에서의 첫 시작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오사카시 항구 지역의 바에서 보이(종업원)와 접시닦이로 시작한 그의 삶은 말 그대로 바닥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내가 당한 만큼 상대방에게 갚아줬다. 손가락 자르라는 일본 야쿠자를 피해 100일간 도망다녔다"라는 그의 고백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고군분투했던 어린 한인 이민자의 처절한 생존기를 보여줍니다. 민단 원로들이 그를 일러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 독종'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생존 본능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그는 오사카에서 우동 노점상을 시작했고, 1948년에는 오사카 미나미 지역에 소규모 식당 '신주쿠'를 열며 사업가로서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이것이 후일 그가 구축하게 될 거대한 사업 제국의 시작이었습니다.
3. 암흑가에서 야쿠자 두목으로 성장하다
전쟁 후 혼란기의 일본 사회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수많은 차별과 어려움을 의미했습니다. 한녹춘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1957년 제3대 야마구치구미에 가입하고 '후지카이(富士会)'라는 자신의 조직을 설립했습니다.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의 7명 오야붕(두목) 중 한 명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일본에서 '다나카 로쿠슌(田中禄春)'이라는 일본식 이름도 있었지만, 항상 자신을 '한녹춘'으로 불렀습니다. 몸은 일본에 있어도 정체성은 한국인으로 유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한국인으로서의 강한 정체성은 후일 그가 재일동포 사회에 기여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캬바레 '비너스'를 오픈하고 1953년에는 미나미 지역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등 사업가로서도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특히 20대에 일본 최대 카바레인 '후지카바레'를 설립하여 사업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4. 재일교포 사회를 위한 헌신과 영향력
한녹춘은 성공한 사업가가 된 후, 자신의 영향력과 재력을 재일동포 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사용했습니다. 그는 오사카 홍성관 건설주임 모임(紅星会)의 회장을 맡아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2003년에는 민단 중앙 및 오사카 지부의 상임고문을 맡았습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소속으로 활동하며 그는 재일교포들의 권익 보호와 한국 정부와의 가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오사카 중앙역에서 건설 기업을 경영하며 쌓은 사업적 성공은 재일동포 사회를 지원하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가 사업가로서 이룬 성공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오사카 일대에 가진 땅만 약 1조 5000억원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후지 관광(富士観光)의 사장을 지내며 그는 재일동포 사회의 경제적 지주 역할을 해냈습니다.
5.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 박정희 대통령과의 교류
한녹춘의 영향력은 재일동포 사회를 넘어 한국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특히 5·16 이후 박정희 대통령과 교류하며 그는 한일 관계 개선과 재일동포 사회의 위상 강화에 기여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반도호텔 운영해 보라"고 권유할 정도로 그의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습니다. 당시 무궁화장을 받은 사람은 단 두 명으로, 다른 한 명은 신한은행 설립자인 이희건 씨였습니다. 2008년 8월 15일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해외동포 42명을 '건국 60주년 행사'에 초청했고, 한녹춘 회장도 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6. 1조 5천억 자산의 비밀과 신한은행 설립 비화
한녹춘 회장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 중 하나는 신한은행 설립에 기여한 것입니다. 그는 신한은행 설립자 이희건 씨를 오사카 흥은 이사장으로 만든 주역이었습니다. 특히 흥은 설립 초기 어려웠을 때, 자신이 운영하던 후지카바레의 일매출을 흥은에 입금시켜 지금의 신한은행 설립의 주춧돌을 세웠습니다.
이처럼 한녹춘은 재일동포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 발전에도 숨은 공로자였습니다. 그의 사업적 성공은 단순한 개인의 부(富) 축적을 넘어, 모국의 발전을 위한 헌신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7. 한녹춘이 남긴 유산과 오늘날의 의미
2017년 11월,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한녹춘 회장. 그가 설립한 후지카이는 현재 일심회(一心会)로 알려진 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의 사업 제국은 일본 간사이 지역 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한녹춘 회장은 77년 동안 일본에 살면서도 한국말을 거의 잊었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한국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는 몸은 일본에 있어도 "마음은 줄곧 한국에 머물렀다"고 고백했습니다. 77년 동안 일본땅을 한국이라고 생각했고, 한국을 본국(本國)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애국심은 오늘날 해외 동포들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암흑가에서 시작해 사업가로, 그리고 재일동포 사회의 대부로 성장한 한녹춘의 삶은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성공을 이룬 이민자의 표상입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개인의 영광으로만 여기지 않고, 재일동포 사회와 모국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의 암흑가에서 시작해 재일동포 사회의 중심인물로 성장한 한녹춘의 파란만장한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애국심과 리더십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의 이야기는 해외에서 고군분투하는 모든 동포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역사적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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